| 씽의 관점에서 | ||
| [괴물(1982), 담배 자국, 매드니스] | ||
| 콜 | 에세이, 일러스트 | ||
| sample | ||
The thing (1982)에 대하여호러는 늘 경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내부와 외부, 나와 너, ‘우리’와 ‘그들’. 존 카펜터의 The Thing(1982)는 이러한 경계들을 흐리는 이야기로, 이 경계를 침범하는 존재에 대한 공포를 탐구하는 영화입니다. 간략한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남극의 기지에서 얼음 속에서 굳이 파낸 생명체를 굳이 기지로 데리고 왔는데 사실 그게 어떤 생명체로든 변할 수 있는 생명체였다고?! (그리고 오, 개.)’ 훌륭한 프랙티컬 이펙트와 매력적인 캐릭터들, 수없이 오마주되는 상징적인 시퀀스들과 최고의 공포영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으로 손꼽을 만한 음악 외에도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제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각각 인간의 관점과 생명체(‘씽’이라고 지칭하겠습니다)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보고자 합니다. 에세이에 앞서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누르시고… 영화를 보신 후에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웨이브에 괴물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씽이라고 검색하시면 노래하는 동물 영화가 나올 겁니다. 그건 개가 아니야도플갱어의 섬뜩함은 단순히 똑같은 외형의 낯선 존재를 마주하는 데서 오는 불쾌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확고하다고 믿었던 '나'라는 존재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침범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기인합니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지만, 나와 똑같이 생긴 존재의 가능성만으로도 '나'라는 유일성은 위협받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외부로 드러나는 신체, 특히 외형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The Thing'은 이러한 도플갱어의 공포를 극대화합니다. 융합과 변형이라는 극단적인 신체 변화 뿐만아니라, 내가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뀌어도, 혹은 타인이 '나'를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겉으로 드러나는 공포보다 훨씬 깊숙한 존재론적 불안감을 자아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외부의 시선에 의해 재단되는 '몸'을 통해 정의되고 판단받는 우리의 취약한 현실을 바라보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디 호러는 단순히 혐오스러운 이미지를 전시하는 장르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가 사회적, 문화적 담론 속에서 어떻게 끊임없이 재정의되고 규정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신체는 타인의 시선과 판단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핵심적인 자아의 개념조차 타인의 인식과 사회적 규범이라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놓여 있습니다. 'The Thing'은 이러한 불안정성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외부의 위협('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잡아먹으러 온 괴물이 아니라, 누군가가 '우리' 중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입니다. 동시에, '그것'의 모방 능력은 나라는 존재의 외적인 유일성과, 이를 통해 누군가를 정의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흔들어놓습니다. 그래서 이 일말의 가능성만으로도, 확고하다고 믿었던 '나'라는 존재는 뿌리부터 흔들리며 사람들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불안감에 대처하는 방식은 결국 부족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확신하고 정의내리려는 인간의 본능을 드러냅니다. 영화의 결말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 시도도 이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씽'인가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행위는, 단순히 열린 결말에 대한 불편함을 넘어, 불확실한 존재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통제하려는 인간의 강렬한 욕망을 보여줍니다. "맥크리디와 차일즈 중 누가 '씽'이지?"라는 질문은, 불안정한 가능성 앞에서 어떻게든 확실한 답을 찾아내려는 몸부림입니다. 특정한 인물을 '씽'으로 정의하는 순간, 불확실성은 해소되고 모든 혼란스러운 행동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너와 나, 외부와 내부의 바운더리를 세우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과 정의는 종종 부족한 데이터에 기반한 성급한 판단이며, 영화 속 인물들이 서로를 의심하는 과정에서 겪는 손실을 되풀이하게 만듭니다. 'The Thing'은 외부의 괴물이라는 공포를 통해,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라는 존재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 앞에서 확신을 갈망하는 인간의 성질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숨기에 가장 따뜻한 곳이다이 영화와 늘 함께 이야기되는 것은 ‘우리 사이에 숨은 우리인 척 하는 타자’에 대한 공포입니다. ‘씽’은 자주 냉전 시대와 연관되어 분석되기도 하고, 이민자에 대한 공포나 에이즈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간혹 ‘씽’의 동화적인 특징을 ‘권력 혹은 사회에 의한 개인의 정체성 말살’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에서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은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애초에 ‘씽’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릅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괴물’의 모습들은 전부 다른 생명체를 모방하는 모습들 뿐입니다. 즉 다른 생명체를 모방하는 ‘씽’의 정체성 또한 상실된다는 것입니다. 에이리언이나 다른 ‘크리쳐 피쳐’의 크리쳐들과 달리, 우리는 ‘씽’의 본연의 형체조차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 특징이 그들을 고전적인 ‘침략자’와는 다른 포지션을 지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원형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을 모방하고 동화되기를 택합니다. 모방의 실패는 곧 박멸로 이어집니다. ‘씽’은 다른 러브크래프트 신화적 존재들과도 다르게 인간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에 대한 악의를 가지거나 파괴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 ‘씽’을 더욱 두려운 동시에 흥미롭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씽’의 존재가 ‘우리 사이에 숨은 우리인 척 하는 타자’로 해석되기도 한다고 하였는데, 이 때의 ‘타자’란 기성 집단에 의해 정의되는 것입니다. 기성 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모방하는 일은 어딘가 익숙하게 다가옵니다. 소수자들이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자주 취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씽’의 관점에서 영화를 다시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 영화는 인간에게 호러인 만큼이나 ‘씽’의 관점에서도 최소 스릴러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행성에 덩그러니 떨어진 지 10만 년이 되었는데 갑자기 생긴지 200년 조금 넘은 나라에서 온 50살도 안 되는 사람들이 나더러 외계인이라고 하고 화염방사기를 꺼냅니다. 심지어는 돌아가기 위한 우주선을 다시 만들려는 시도를 저지하는 것도 이 인간들입니다. 나는 몇 안 남은 개체(씽의 개체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을 제쳐두고)로서 이 위기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전원 남성이고 폐쇄적인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도 다르게 다가옵니다. 당신이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같이 맨박스에 기어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의 일부를 불태워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실제로 현실에서도 이와 같은 행동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에 반하는 말과 행동을 녹아들기 위해 하는 것. 이는 때때로 내면화되어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어디까지가 ‘씽’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이 이 80년대 백델테스트 낙제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왜 화면에 나오는 것 중 여자에 가장 가까운 게 컴퓨터인 80년대 구닥다리 공포영화를 봐야 하지?” 그럼 저는 말합니다. “보지 말든가” 그리고 “솔직히 모두를 위한 영화는 아니긴 해”.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호러는 종종 (혹은 자주) 구립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호러 장르를 정말로 좋아합니다. 늘 타자에 대한 이야기를 시도하고 선을 넘나드는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언뜻 호러 장르는 기존의 사회 규범을 답습하고 강화하여 공포심을 유발하는 듯 보이고, 실제로 옛날 영화들은 그런 경우가 많기도 하죠. 그러나 이러나 저러나 ‘타자’를 적극적으로 조명하는 이야기이기에 소수자들의 재전유가 가장 활발한 장르이기도 합니다. 한 이야기는 굳어져 새겨진 것이 아니고 배경에 따라 유동적이며, 반드시 어떠한 대상을 긍정적으로 묘사해야만 해당 대상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 우리와 닮았지만 명백히 다른 것, 혹은 너무나 닮아버린 나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불안과 공포. The Thing은 이 ‘익숙한’ 타자의 형상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영화입니다. 제작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타자를 누가,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들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직접적으로 소수자들을 괴물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데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멋있잖아요.) 제가 그러한 사람이기에 그러한 이야기를 읽어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 전환이 호러 장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예. 그래서 제가 여기에 쓴 것은 그저 제가 주인공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영화를 반복 시청하며 종종 생각했던 관점을 구체화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보신다면 전혀 다른 해석을 가질 수도, 아예 해석이 없을 수도, 혹은 유튜브에 ‘그래서 이게 뭔데’ 하고 해석 영상을 검색해 보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한 개의 대상에서 이렇게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분명히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가지는 정체성, 속한 집단에 따라 다른 감상이 나올 수 있을 것이며 저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하는 것 뿐입니다. 이 영화는 어쩌면 사회적 메세지나 은유로 읽힐 수 있는 내용들 외에도 훌륭한 바디 호러 영화이자 심리적 스릴러, 코스믹 호러 영화입니다. 진심을 다해 이 영화를 추천하며, 당신이 이 영화를 당신의 방식으로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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